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11월 28일, 포위 === 밤사이에 유담리 동북쪽을 지키던 7연대 D·E·H중대가 사실상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고, 유담리 남쪽의 보급로를 지키던 7연대 C중대와 F중대는 고립되었다. 이로써 유담리의 5·7 두 연대는 포위된 것이다. 양 연대장은 상의하여 더 이상 서진을 중단하고 방어진지를 축소하기로 하였다. 한편 유담리와 하갈우리까지의 보급로를 보호하기 위해 유담리 남쪽 5 km 덕동고개 북쪽 터키힐에 C중대, 12 km 지점 덕동고개 남쪽 폭스힐에 F중대가 주둔 중이었다. 이들은 원형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밤사이에 포위당한 채 격전을 벌였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내린 7연대의 지시는 "A·B중대는 유담리에서 터키힐로 싸우면서 내려가고, F중대는 폭스힐에서 덕동고개를 지나 터키힐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F중대 윌리엄 바버 대위는 적의 강력한 저항과 현 진지 위치, 중대 내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7 km를 북진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현 진지 잔류를 요청하였다. 할 수 없이 7연대장 호머 리첸버그 대령은 아직 유담리까지 오지 못해 하갈우리에 있던 2대대장 랜돌프 록우드 중령에게 “북쪽으로 이동하여 F중대와 합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때까지 록우드 중령은 먼저 유담리에 가있던 자신의 대대 소속 D·E 중대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고 F중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 채, 본부중대와 화기중대(감편) 병력으로 '요리사와 제빵중대'라는 이름으로 편성하여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망원경으로 보니 고지마다 적군으로 가득 차있었고, 광산마다 중공군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만으로 폭스힐까지 가는 것은 무리여서 결국 연대장을 하갈우리로 돌아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래도 7연대 A·B중대는 통합연대지휘소를 방어하던 C중대 1소대까지 동원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터키힐의 C중대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F중대가 있는 폭스힐까지 내려가는 것은 사정이 여의치 않자 포기했다. [[올리버 스미스]] 장군은 새로운 지시를 내려 "5연대는 유담리를 방어하고, 7연대는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통하는 도로를 개통시키라"고 명령했다. 장진호 남쪽에 흩어져 있던 1연대에게는 "고토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도로를 개통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하갈우리의 좁은 분지에 위치한 사령부와 물자 창고를 지키고 있는 병력은 해병 1연대 3대대와 7연대 2대대 본부뿐이지만, 각종 지원부대가 15~20개 가량 있었으며, 총 병력은 해병대 3천 명에 육군 600명이 있었다. 하갈우리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실패했고, 남쪽으로 시험 삼아 1연대 H중대를 보냈지만 800 m 정도 가다가 중공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돌아온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통로가 하나밖에 없는데 거기로 안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다.''' 야간전투를 대비하여 하갈우리 남쪽에 해병 1연대 3대대 H중대와 I중대를 배치하고, 북쪽에는 해병포병 D포대가 자체방어를 하였다. 미 육군 70명에 카투사 100명으로 구성된 10공병대대 D중대는 이스트힐을 방어하는 등, 각종 병참 부대에게도 일정 부분씩 방어구획이 배정되었다. 해군공병대만 방어 작전에서 제외되어 조명을 켠 채 밤새도록 활주로 공사에만 전념하였다. 그날 밤 중공군 58사단 172연대가 서쪽에서 173연대가 동쪽에서 하갈우리를 공격하였다(174연대는 예비대). 남쪽을 담당하는 해병대 H·I 중대중에서 H중대가 뚫리며 중공군이 파고들어왔지만, 전과 확대 대신 미군의 방한복을 약탈하러 돌아다니다가 대대의 증원병력에 격퇴되는 등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이스트힐을 담당하는 미 육군 제10공병대대 D중대는 지휘관이 죽자 그냥 후퇴해버렸다. 미군 중 반이 사상당하고, 카투사는 대부분 흩어져 마을의 빈집에 숨어버렸다. 중공군은 이스트힐을 지나 군악대가 방어하고 있는 사단본부를 향해 돌입하였지만, 포병대의 지원으로 방어에 성공하였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중공군 시체 천여 구가 해병대 진지 앞에 널려있었다. 그에 비해 해병대의 사망자는 단 12명뿐이었다. 사실 머리수만 따지면 하갈우리의 미군이나 중공군이나 별 차이 없었다. 그러나 화력이 워낙 [[넘사벽]]이니 중공군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174연대를 예비대로 빼놓고도 미군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니, 이번 경우는 중공군이 --2차 대전때의 일본군처럼--미군을 너무 얕잡아 본 결과이다. 중공군의 전투 방식은 '미군의 강력한 화력망 속으로 뛰어들어 제대로 된 백병전을 벌이면 미군 병사들이 꼼짝 못한다.'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일단 화력망을 뚫는 과정에서 전멸할 지경이고, 어찌어찌 해서 빈틈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미군은 우월한 피지컬과 백병전의 최강자인 권총을 사용하여 격퇴하였다. 육군이 빼앗긴 이스트힐 탈환을 위해 일방적인 포격지원 1,200발, 해병항공대의 폭격 지원 아래, 비전투 행정요원과 낙오병들의 혼성부대를 진격시켜 밤새도록 공격해 29일 낮까지 이스트힐의 정상부 아래까지 밀고 올라간다. 방어부대는 중공군 58사단 172연대 3중대였는데, 중대장 양건쓰는 자폭까지 하며 결사적으로 싸워 후대에 이름을 알렸다. 사실 중공군 58사단은 27일 하갈우리를 남쪽에서 공격해야 했지만, 워낙 험난한 지형 때문에 하루 늦게 도착하였다. 또한 중공군 80사단이 하갈우리 북쪽에서 공격해야 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장진호 동안으로 올라온 육군에게 막혀서 협조된 공격을 벌이지 못했다. 한편 덕동고개를 지키던 7연대 F중대는 전날의 전투에 발생한 사상자 77명 때문에 방어선을 축소한 채 다시 한 번 결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연대에서는 오전에는 "북쪽으로 올라와 유담리에 합류하라"고 하고, 오후에는 "남쪽으로 철수해 하갈우리로 가도 좋다"고 하였지만, 북쪽이든 남쪽이든 도저히 움직일 상황이 아니었다. 이날 밤에도 다시 중공군이 쳐들어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어떻게든 격퇴하였다. 이날 중대장 바버 대위가 얻은 결론은 이러했다. >중공군은 멍청했습니다. 매일 밤 거의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로 공격해왔고, 돌격하기 앞서 나팔 소리, 호루라기, 고함지르기 등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으며, 우리를 기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은 시신 200여 구를 놔두고 후퇴했다. 한편 장진호 동안의 육군은, 28일 주간에는 병력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었다. 페이스 부대는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어 항공 폭격 아래 원래의 방어선 대부분을 회복했지만, 어제 빼앗겼던 1475 감제고지 탈환만은 실패했다. 미 해병대의 F4U 외에도 남아프리카 연방군의 F-51도 지원되었다. 아침에는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 [[함흥]]에서 하갈우리까지 L-17기를 타고 와서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을 만나 협의하였다. 이어 헬기를 타고 장진호 동안 육군의 전방지휘소로 와서 페이스 중령과 맥클린 대령을 만났다. 알몬드 장군은 페이스 중령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한 뒤 "귀관들이 본 중공군은 북쪽으로 도망치는 낙오병에 지나지 않으니 염려하지 말라."라고 했다. 알몬드 장군이 떠난 후 페이스 중령은 은성무공훈장을 뽑아 땅에다 던져 버리며 "제기랄"이라고 중얼거렸다. 맥클린 대령은 아직도 예하 부대가 밤사이에 어떤 파멸적 피해를 입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31연대 2대대만 도착하면 북진하겠다"고 알몬드 장군에게 말했다. 페이스 부대의 소규모 접전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저녁에는 탄약작업반이 도착하여 탄약 보급을 받았다. 그보다 남쪽에 있는 안곡의 맥클린 부대 본대도, 낮이 되자 방어선을 회복해 나갔다. 밤사이에 도망쳤던 소총병들도 슬금슬금 방어진지로 돌아왔다. 부상당한 3대대장 라일리 중령은 아침에는 지휘를 계속하였으나, 낮에는 의식을 잃었다. 조금 후방에 있던 제57포병대대 본부와 본부 포대, 대공포대는 이동하여 3대대 방어진지 안으로 들어왔다. 오후 1시경 대공포대가 방어진지로 들어오자 가공할 만한 화력을 뿜었는데, 이후 중공군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했다. 28일 오전 10시 후동리의 전차들은 지원을 위해 북쪽으로 출발하지만, 30분 만에 중공군에게 노획된 3.5 로켓포 세례를 받아, 2대는 파괴되고 2대는 길에 미끄러져 도로 옆 배수로에 처박히고, 결국 후퇴했다. 후동리에 있던 헨리 호스 부사단장은 전차 1대를 빌려 타고 하갈우리로 돌아갔다. 호스 부사단장이 떠난 후에는 연대장 맥클린 대령도 없는 상태라, 작전주임 앤더슨 소령이 지휘권을 행사했다. 이어 1마일 후방에 있던 57포병 근무포대가 합류하여 연대 본부 병력과 합쳐 150명이 되었다. 여기에 전차중대 병력이 176명이 있었다. 중공군은 전차 때문인지 후동리로 전면 공격은 하지 않고, 지속적인 저격만 하여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후동리의 후방지휘소는 풍유리(안곡)에 있는 31연대 병력은 물론, 그 전방에 있는 페이스 부대와도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28일 저녁 장진호 동안의 육군에도 중공군 80사단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전방의 페이스 부대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시간인 자정에야 공격이 개시되었다. 전면의 A, C중대와 동쪽의 B중대에 심한 압력이 가해졌다. 모든 박격포는 최대 속도로 쏘아대었고, 지휘부에 있는 모든 장교들은 막사 밖으로 나가 경계를 도와야만 했다. 맥클린 특수임무부대에도 80사단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중공군은 낮에는 요란사격(Harassing Fire)을 하였고, 밤에는 전날을 능가하는 강도로 3~4시간 동안 치열한 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안곡 방어진지에는 전날과 다르게 주간에 M19 대공전차와 M16 대공장갑차가 들어와 있었다. K중대가 일시적으로 돌파당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대공포들이 화력을 쏟아 부었다. 특히 40밀로 포보스 포는 분당 240발을 발사 속도로 단 몇 초 만에 적의 공격을 좌절시켰다. 중공군 지휘관은 대공포를 파괴하는 병사에게 많은 포상을 약속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결사적으로 대공포만 노리고 육탄 공격을 감행하여, 대공포 위에서 육박전까지 벌어졌다. 어제와 달리 포병들은 자신들의 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안곡 진지 주위에는 750구의 중공군 시체가 발견되었다. 한편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맥아더에게 “11월 28일 22시부로 10군단의 공격을 중지하고 후방으로 철수한 후, 급편 방어로 전환하여 적의 차후 공격에 대비하겠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9일 새벽 3시(또는 4시 30분) 가장 북쪽에 있던 돈 페이스 중령의 32연대 1대대는 6 km 후방인 풍유리강 하구로 후퇴하여 맥클린 부대와 합류하게 하였다.[* 이 부분은 확실하지 않은데, 상부의 지시가 아닌 페이스 대대장의 결심에 의한 후퇴라는 책도 있다. 방어진지가 구축되지 않은 남서쪽으로 중공군이 쳐들어올까봐 포위당하기 전에 미리 후퇴했다는 것이다. 또는 함께 있던 맥클린 연대장의 지시일 수도 있다.] 부대는 60대의 차량을 타고 별 저항 없이 후퇴하였다. 모든 장비와 물자는 포기하였고, 오직 병력들만 태워 이동하였다. 중공군은 뒤에 남겨둔 보급품과 장비를 노획하느라 사격을 중지하고 추격하지 않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중공군에게, 미군이 버리고 간 주둔지는 신천지였다. 후퇴 자체는 약간 무질서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풍유리강 하구에 안곡 진지에 있던 57포병대대를 직접 공격하던 중공군을 북쪽에서 후퇴한 페이스 부대가 후방에서 공격하는 양상이 되었고, 이에 앞뒤로 짜부된 중공군은 60명이 사살당하며 깜짝 놀라 도망친다. 덕분에 도로가 개통되어, 페이스 부대는 손쉽게 풍유리로 후퇴할 수 있었다. 아침 9시에 페이스 부대의 선두 부대가 도착하여 오후 1시까지 전부 맥클린 부대의 방어진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풍유리는 말이 방어진지이지, 밤사이의 전투로 수많은 중공군의 시신과 연기로 뒤덮여 작살나 있던 상태였다. 페이스 부대는 즉시 방어진지 북쪽선 방어에 들어갔다. 한편 함께 후퇴하던 맥클린 연대장은 안곡에 거의 다 온 11월 29일 동틀 무렵, 접근해오는 행군종대를 발견했다. 그는 31연대 2대대가 이제야 오는 줄 알고 기쁨에 겨워 사격 정지를 외치며 차에서 내려 홀로 400 m를 뛰어갔으나, 도착해보니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맥클린 대령을 포로로 잡아끌고 갔고, 이를 멀리서 보던 미군들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앨런 맥클린은 포로가 된 지 나흘째 사망하였고, 근처에 대충 묻혔다. 그토록 바라던 31연대 2대대는 아직도 [[함흥]]에 있었다. 이들은 11월 30일에야 고토리에 도착했다.] 맥클린이 실종되자 페이스 중령은 수색대를 보내 그를 찾았지만, 결국 포기했다. 1952년에야 중공군에게 풀려난 미군 포로에 의해 맥클린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맥클린에게는 사후 [[수훈십자장]]이 수여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전투 중 목숨을 잃은 최선임 지휘관이었다. 페이스 중령과 부상당한 라일리 중령은 즉각 회합을 갖고, 2개 대대와 포병대대를 견고한 원형방어선 안으로 통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페이스-맥클린 부대를 페이스 중령이 통합 지휘하기로 하였다. 대대지휘소로 쓰는 초가 안과 밖에는 시체와 부상당한 병사들이 전날 밤의 격전을 알려주듯이 누워 있었다. 중공군만 해도 시체 20여 구가 있었다. 재편성된 방어진지는 31연대 3대대가 동쪽, 32연대 1대대가 북/서/남쪽을 방어하며 중앙에 중박격포 소대, 57포병대대, 대공포대가 배치되었다. 이 통합지휘에는 후동리에 있는 31연대 본부와 전차중대는 제외되었다. 부대대장인 밀러 소령이 1대대를 지휘하였으며, 스톰 소령은 3대대, 작전장교 톨리 소령이 57포병대대를 지휘하였다. 여전히 해병대나 미10군단과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전방항공통제관 스탬포드 대위를 통해 콜세어 공격기와는 통신이 가능하여, 이를 이용해 약간의 보급품을 공수 받았다. 무엇보다 40밀리 대공포 탄약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후동리의 31전차 중대에 공수되었다. 31전차 중대가 필요한 것은 전차포 탄약이었는데, 이를 보급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어서 해병의무수송헬기 2대가 차례로 도착하여 부상자 4명을 후송했는데, 첫 번째 헬기에는 3대대장 라일리 중령과 57포병대대장 엠브리 중령이 후송되었다. 이어 L-5 연락기로 모르핀이 1번 보급되었는데, 이것이 지원의 전부였다. 한편 28일 오후 8시 27분 기준으로 [[장진호]] 지역의 모든 육군은 해병대 스미스 사단장의 작전 통제를 받게 되었다. 페이스 중령은 “풍유리강 하구의 육군 부대에 사상자 500명이 발생했고, 스스로 돌파구를 개척할 전투력을 상실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스미스 장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갈우리에 도착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날 맥아더는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에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 >우리 전투병력의 현 상태는, 중공이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한 전쟁을 치를 준비가 확실히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본 사령관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으나, 본관의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라는 유명한 암호전문을 보낸다. 직전까지 자신만만하던 맥아더의 태도와 180도 다른 소식을 들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언론 브리핑에서 "가공할 만한 상황이 눈앞에 닥쳐있습니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어 맥아더는, 대책회의 차 일선에서 박 터지게 바쁜 알몬드와 워커 장군을 동해를 넘어 1,120 km 떨어진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소환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알몬드 군단장은 아침에는 해병 1사단장 스미스를 만났고, 점심에는 페이스-맥클린을 만났으며, 오후에는 7사단장 바와 만나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 바쁜 와중에 저녁에 맥아더를 만나러 [[도쿄]]까지 간 것이다.] 도쿄의 주일미국대사관에서 열린 전쟁대책회의의 참석자는 맥아더 아래 극동군 해군 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 중장, 극동군 공군 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극동군 참모장 도일 히키 소장, 극동군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 맥아더 참모고문관 코트니 휘트니 소장, 극동군 작전참모 에드윈 라이트 준장이었다. 이 회의에서 워커 중장은 “중공군을 [[평양]]에서 저지하겠다”는 합리적인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던 알몬드 중장은 “장진호에서 해병대는 서쪽으로, 7사단은 북쪽으로 진격하겠다”고 하였다. 회의 중에 맥아더는 듣고만 있다가 회의가 끝난 후 워커와 알몬드만 불러 따로 지시하는데,[* 맥아더는 회의 자체를 싫어했다. 오직 지시만 내릴 뿐이었다.] “8군은 [[평양]]을 방어를 위해 노력하다가 측면이 위협받으면 후퇴하고, 10군단은 장진호에서 철수하여 [[함흥]]-[[흥남]]의 해안에 병력을 집중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해병사단에 철수 지시가 내려온 것은 30일이다. 알몬드 장군은 맥아더의 무조건적인 Yes맨인데, 왜 맥아더의 지시를 안 따랐을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이 당시 맥아더든 알몬드든 해병대에 대해 죽든 살든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육군은 이미 전면 후퇴하고 있던 상황에서, 해병대만 30일까지 철수 지시를 못 받아 고립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